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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방송] 재소 고려인 한글문학평론가 정상진 ‘내가 직접 겪은 강제이주’(원문)
-고려인동포들이 발행해 온 고려일보(2007년 8월24일자)
1937년 8월 21일은 소련 고려인 역사에서 피와 눈물의 페이지로 되어 있다. 바로 이날 소련정부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소련 러시아원동변강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을 강제로 대중적으로 카사흐스탄과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킬데 대한 비인도주의적인 범죄적 결정서를 채택하고 그의 철저한 실천을 해당기관들에 지시하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소련내각총리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스탈린이 비준한 결정서에는 “소련 원동변강연해주의 23개 국경지대의 지역에서 원동에로의 일본간첩들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체 고려인 주민들을 이주시킬 것이다”라고 지적되었었다.

이렇게 전체 고려인들은 멀고 먼 중앙아시아 지역과 카사흐스탄에로 강제이주되게 되었다. 일체 고려인주민들의 이주는 1938년 1월 1일까지 완료하기로 되어있었다.

알렉싼드르 이싸예비츠 솔제니찐의 증언에 의하면 9월 11일 19시 20분에 “원동 연해주에서 전체 고려인들을 이주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라는 스탈린의 서면 지시가 정부에 하달되어 처음에는 단지 23개 국경지역에서만 이주하기로 되었는데 스탈린의 단독 지시에 의하여 연해주 일대의 전체 고려인들이 강제이주를 당하게 되었다.

이상 결정서에는 적지 않은 모순과 부정확한 점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그후 알게 되었다.

조선 북부에서 기아와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살길을 찾아 러시아 연해주에 이주해 온 한인 전부를 일본간첩으로 간주했으며; 결정서에는 이주민들이 일체 자기들의 재물, 농기구, 가축 등을 가지고 가도록 되었는데 실제에는 손에 들고 등에 질 수 있는 양식, 옷, 침구만을 가지고 기차에 오르게 하였으며, 남겨 둔 부동산과 가축에 대하여는 보상하겠다고 되었으나 전혀 보상하지 않았으며;이주에 동의하지 않는 고려인들은 다른 나라에 갈 수 있도록 결정서에는 지적되어 있었는데 조선에 가려고 말한 고려인들은 오히려 탄압되었으며,이주 기한은 1938년 1월 1일까지로 되었는데 1938년 3월에야 완료되었다.소련과 일본과의 관계가 첨예화 되어 갈수록 고려인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하여졌다.

결과 20만명에 달하는 고려인들이 소련사회의 전기간의 탄압의 대상으로 되었으며 소련에서 불신민족으로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강제이주는 1937년 9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일체 국가기관기업체들에서 고려인들은 해직되었으며 군대에서 제대되어 이주되었다.

고려인 대학, 전문학교, 소중학교들과 문화계몽기관들의 이주에 대한 보충적인 지시가 있어서 한글로 된 교과서, 도서 전부를 가지고 가게끔 되어 있었는데 도착지에 와서 한글로 된 서적들을 갖고 있는 자들은 구속되어 형벌까지 받기도 했다.



강제이주에 대한 정부와 당의 결정서가 알려지자 일부 고려인들은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사회안전기관은 고려인들 속에서 여론조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결과에 많은 고려인 인테리들이 구속되어 총살형까지 있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었다.

극히 소수 지식층에서는 숨은 희망을 품기도 했다. “혹시 고려인자치주를 만들기 위하여 이주할 수도 있지 않는가?” 이상 모든 여론들이 사회안전 비밀경찰에 의하여 수집되어 많은 고려인 인테리들이 탄압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산림속에 숨었다가 붙잡혀 이주되기도 했다. 고려인들의 이주생활은 어떠했는가? 내 자신이 강제이주를 당한 산 증인으로 되어 있다. 당시 나의 나이는 19세 대학 2학년생이었다.

1937년 9월 25일 연해주 블라지보스똑시에서 32개의 마소를 운반하는 화물차량들로 된 첫 이주열차가 떠났다. 나는 지금도 우리를 전송하는 친지, 친척, 친우들의 울음, 통곡, 저주의 목소리를 듣는 듯 싶다. 너무나 비참했다.

이 열차에는 조선사범대학 학생들과 교직원들, 조선극장 배우들, “선봉” 신문사 사원들, 조선라지오 방송원들이 올랐다. 이 열차에 나 자신도 통곡의 눈물을 흘리면서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님과 세 어린동생들을 두고 떠나게 되어 너무나 비통하였다.

역전 땅바닥에 앉아서 땅을 두주먹으로 치면서 “나의 자식들을 죽을 데로 보내는구나!”라고 소리쳐 통곡하는 백발의 할머니를 나는 지금도 보는 듯 싶다.

강제이주를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고 인정된 2800여명의 선진 인테리들, 학자들, 군장교들이 체포되어 예심도, 재판도 없이 총살되었다. 학살당한 인테리들 속에는 나의 부친도 있었다. 나는 지금 부친의 묘소를 모르고 있다. 총살된 수천명을 합장했다는 소문도 있다.

이렇게 소련정부와 공산당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던 공산주의 이념, 레닌에 대한 존경심까지도 조선족 우수한 인테리들과 함께 총살해 버렸다고 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1937년 소련 연해주에서 실시한 조선족의 강제이주는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잔혹하고, 비참하고도 야만적인 이주였으며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 공산체제가 저지른 이런 범죄행위는 인류가 잊어서는 안될 교훈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소련에서 제2차 세계대전후 독일족, 체첸족, 칼미끼아족, 크림-따따르족, 터키족 등 많은 민족들이 강제이주를 당했다. 이들의 이주는 조선족의 강제이주보다 더 처참하였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후 러시아 연해주는 어떤 상황에 처하여 있었던가? 고려인들이 살던 606개의 촌들이 지도에서 없어져 버렸다. 내 자신이 2004년 10월에 연해주 고려인들의 고장들을 직접 찾아 보았다. 너무나 우울했다. 606개의 마을들은 죽어 버렸으며 전부가 바람과 쑥이 주인노릇하는 쑥밭으로 변하여 버렸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이 저질러 놓은 소련에서의 민족말살정책의 비참한 후과이다.

1917년 10월혁명 후 레닌이 다민족국가를 창설하면서 가장 소중하게 배려와 관심을 돌린 문제가 바로 러시아에서의 정당하고도 진정한 민족정책의 철저한 실시였다.

때문에 레닌은 새로 창건되는 소련 다민족국가는 제정 러시아의 민족말살, 억압, 탄압, 이간정책을 계속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수차 자기의 저서, 론문들과 서한들에서 강경하게 강조하였다.

러시아제국내에는 130개의 민족들과 준민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인민들간의 우호, 화합, 친선 관계의 설정이 긴급 문제로 제기되고 있었다.

이렇게 레닌은 러시아에서의 정당한 민족정책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소련국가의 앞에는 세계의 적(삼대적)이 있는바:

첫째로-대러시아 민족주의,
둘째로-공산주의 오만성,
셋째로-무식이라고 지적하면서 만일 이 세 적을 이겨내지 못하는 한 소련체제는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유언하였다.

그런데 레닌이 그처럼 소중하게 여겨 오던 민족정책을 스탈린은 짓밟아 버리고 민족들간의 이간, 불신임, 적대심의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레닌은 심지어 소수민족들을 관대하게 대하며 그들에게 모든 문제들에서 양보하면서 친선, 화합, 단결의 기치하에 모든 민족들을 단결할 것을 유언하였다.

스탈린은 이와 같은 민족정책을 무시하고 소수민족들을 탄압하는 길에 들어섰다.

이런 점에서 소련역사를 고찰한다면 1937년의 조선족 강제이주는 벌써 장차 소련체제의 붕괴의 징조로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결국 소련은 무식은 그런대로 퇴치했으나 대러시아민족주의와 공산주의자의 오만성은 이겨내지 못하였다.



대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지금도 모스크바, 상-뻬쩨르부르그를 비롯한 많은 지역들에서 타민족들에 대한 만행을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신문, TV 방송들을 통하여 자주 듣고 목격하고 있지 않는가.

강제이주 후 조선족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비참했다. 강제이주를 당한 조선족은 카사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초원들에서 집도, 가구도, 농구도, 돈도 없이 땅굴을 파고 추운 겨울을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1937-38년 이주 초년 기간 토질병과 추위에 죽은 자가 만여명에 달하였다. 주로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죽었다.

나 자신은 그 당시 이주된 친척-친지들을 찾기 위하여 많은 촌락들을 찾아다니면서 매일 많은 장례를 목격한 바 있다. 너무나 비참하고도 슬펐다. 간 곳마다에는 울음소리뿐이었다.

병원도, 의사도, 약도 없이 이 초원에서 죽어가는 조선족 형제자매들의 비운의 처지를 목격하면서 자기의 분노를 토로할 수도, 어디에 송사할 수도 없는 운명에 우리는 처하여 있었다.

우리 조선족은 강제이주 후 소련헌법에 제정된 많은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군대복무에 대한 권리, 국내에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권리도, 소련의 대도시들에서 권위있는 대학들에서 공부할 권리도, 심지어는 참전할 권리까지도 없는 무권리의 시민들로 되어 버렸다.

고려인의 시민증에는 일정한 지역에서만이 살 수 있게 지적되었다. 다른 도시, 촌들에 가는 경우 반드시 경찰서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다행히도 10만명의 이주민들은 카사흐스탄에서 살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에 카사흐민족보다 더 선하고, 착하고 너그러운 민족이 있다고 하면 믿지 못할 정도로 우리 고려인들은 카사흐인들을 존경하고 또 앞으로도 그들과 친목하게 살면서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이주민들을 무한히 동정하면서 가능한 모든 면에서 방조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직접 목격한 너무나 감동적인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다.

1937년 11월 초 추운 카사흐스탄 크슬-오르다주 잘라가스 초원에 조선족 이주민들이 도착하였다. 집도, 먹을 것도 없는 초원이었다. 어린이들과 여인들이 울기 시작하였다.

“죽으라고 이런 곳에 실어 온 거야!”

하는 통곡이 이곳 저곳에서 터지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외로웠다. 이렇게 어려운 때 주변 카사흐인들이 이름 모를 사람들이 초원에 실려 와서 어려운 형편에 처하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빵을 구워 식기 까바이를 불에 싸서 담나귀에 실어다가 먼저 어린이들과 노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그 빵을 먹으면서 울었다. 카사흐여인들도 우는 우리의 어린이들을 포옹한 채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이 자진하여 우리를 찾아 온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말을 모르니 악수하면서 감사표시했을 뿐이었다.

이런 선하고 착한 인들이 다른 고장들에서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너그럽고도 착한 인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영원한 형제민족이 되었다.

카사흐스탄은 우리의 고향으로, 우리의 후손들의 조국으로 되었다.

70년 전에 이주된 고려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 자신은 나의 생활, 운명-모든것을 카사흐스탄에서 받았다. 카사흐스탄에서 고등지식을 받았으며 카사흐스탄에서 군대에 입대하여 소련태평양함대 해병대의 일원으로서 1945년 8월 9일부터 9월 3일까지 조선의 웅기, 나진, 청진, 어대진 해방전투에 참전하여 일제를 타승하고 북조선에서의 인민정권 수립에 참가하여 13년 동안 나라의 문화건설에 기여한 바도 있다.

1957년에 귀국하여 카사흐스탄에서 계속 일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살고 있다. 이처럼 카사흐스탄은 나와 모든 고려인들에게 있어서 은혜의 나라로, 나의 후손들의 조국으로 되어 있다.

현재 카사흐스탄에는 10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우리는 카사흐스탄을 아름다운 고향으로 삼으면서 카사흐스탄의 120여개의 민족들과 함께 친목하게 살면서 나라의 부흥발전에 힘써 노력하고 있다.

70년 동안에 우리들과 카사흐인들 사이에는 한번도 마찰이나 갈등충돌이 없었다. 또 있을 수도 없다.

카사흐인민의 위대한 시인이며 철학가이며 성현이신 아바이 꾸난바예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너그러운 성품, 남을 친형제처럼 받아들여 그에게 선만을 원할 줄 아는 성품, 이것은 다 심정의 부유인이다.”

이런 성품을 품은 민족이 바로 카사흐인들이다. 이런 너그러운 백성들과 함께 우리는 70년을 살아왔다. 나는 자주 외국에 여행하면서 강의를 하기도 한다. 강의시에 10분-15분 정도 나는 꼭 카사흐스탄에 대하여 자랑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다.



카사흐스탄에서는 300여명의 고려인 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 중 60여명은 박사들로서 정치, 경제, 기술, 과학영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르심을 따라 우리 고려민족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1937년의 20만으로부터 54만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 옛소련지역에서 거지가 없는 민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1937년의 강제이주의 치욕적인 비극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고려인들은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세계 한인들과 함께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 살든지를 막론하고 어떤 영역에서 일하며 활동하든지를 막론하고 한반도의 영광스러운 한민족의 긍지를 잊지 않고 떳떳하게 전 세계 인류의 대오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며 일하여 나갈 것에 대하여 나는 의심치 않는다.

금년은 소련에서의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70주년이 되는 해이며 너그럽고도 선스러운 땅 카사흐스탄에서의 고려인들의 정주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주년을 카사흐인민과의 친선의 명절로, 카사흐스탄 나사르바예브 대통령의 민족정책의 승리의 명절로 성대한 행사들을 전국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카사흐스탄에서도, 러시아에서도 고려인들은 자유롭게 살면서 내일을 확신있게 바라보고 있다.

재소 고려인 한글문학평론가 정상진

고려방송: 유가이발레르(고려방송) 기자

관리자   작성일 : 2026년 08월 31일 10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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